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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자 이사장 사진
설립자 故김상수 초대이사장

"겨레의 새빛이 되라"

  • 신부선생은 김해 김씨 73대손으로 김녕군 휘 안경공파 17대손이며 통정공 휘 종일문중으로는 8세손이다. 5대조 제린씨는 좌승지를 봉직한 전통적인 가부장적 유교가문이었다. 아호인 ‘신부(信夫)’는 ‘신용(信用)을 신조로 한다’는 기업이념과 부친의 관직인 ‘통정대부’의 끝 자를 딴 것이다.


    1937년 17세의 소년 김상수는 경제를 알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오사카 명정상업학교에 입학한다. 일본 유학은 선생으로 하여금 무한한 꿈을 가지게 했고, 동시에 일제에 의한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 체제하의 조국의 현실을 비교하면서 크나 큰 안타까움을 가졌다. 그 시절 소년 김상수의 가슴에 새긴 하나의 큰 뜻은 사업을 하여 성공을 하면 조국의 동량(棟梁)을 기르는 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신부 선생은 일제하에서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구국의 대열에 뛰어든 애국지사였다. 1939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부산에서 사업의 기반을 다져 가던 중, 청년 김상수는 일제의 만행에 의분을 느끼고 1944년 독립군 군자금을 조달하는 일에 가담하였고, 동지들과 태극기에 대한 대한독립을 결의하는 혈서를 쓰게 된다. 이러한 의로운 행동으로, 선생께서는 그해 11월 부산 헌병대에 체포되어 한 달여 동안 헌병대 감옥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아사직전까지 가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야 했다.

    해방과 함께 1945년 8월 16일 밤에야 비로소 석방되니, 그 때 나이 26세였다.
    젊은 나이에 조국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구사일생으로 출감하여 출옥동지 위원장과, 1946년 여운형이 결성한 건국준비 위원회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곧 정치활동을 정리하고 사업에만 전념한다.

    신부선생의 일생은 애국과 근검, 내실과 창의로써 일관된 자강(自彊)과 자율(自律)을 실천한 자기성찰의 길이었다. 위기를 극복하는 투철한 사명의식과 불굴의 협력정신, 그것이 오늘날의 성신(星信)을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신부(信夫) 김상수(金祥洙) 성신학원 설립자의 창학 이념은, 전통적인 경신숭조(敬神崇祖)사상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나라와 겨레에 대한 사랑을 모색하고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복산동 터에 ‘나라와 겨레의 찬란한 새 빛이 되라’는 큰 뜻으로 성신고등학교의 문을 여셨다.

    본교는 신부 선생의 숭고한 교육보국에의 창학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학교장과 전 교직원이 합심하여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꾸준히 연구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21세기 글로벌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